‘아버지, 남편, 아들’, ‘기체, 액체, 고체’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올바른가?
삼위일체 언급한 성경의 구절은?
삼위일체,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해야하며,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제시해 주는 지침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성적 의미
이정순 교수(목원대 신학과)
기독교 절기력으로 성령감림절이 지나면 바로 삼위일체주일을 지킨다. 물론 교회력을 중요시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삼위일체 주일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 올해는 6월 16일이 바로 삼위일체주일이다. 삼위일체주일이 교회력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삼위일체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다. 특히 삼위일체는 예배의 중요 전통으로 오랫 동안 내려오고 있다. 좋든 싫든 기독교인이라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교백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도 없을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앙인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많은 의문이 든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충분한 신학교육의 부재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어떤 목회자와 나눈 대회가 생각난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 신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왜 삼위일체를 믿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삼위일체를 한 마디로 설명해 보라고 요구했다. 나는 최근의 해석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그는 납득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5분에 걸친 설명으로 삼위일체가 다 설명될 수 있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우리 현실이다. 왜 우리는 유대교처럼 야훼나 엘로힘으로 계시된 한 분 하나님만을 믿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현대신학자 폴 틸리히 교수가 하버드에서 강의할 때 어떤 학생이 왜 우리는 유니테리안(Unitarian, 단일신론자)이 아니고 삼위일체(Trinitarian)를 믿는 자들인가 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이 물음에 틸리히는 유니테리안이나 유대교의 유일신론보다는 삼위일체가 더 역동적인 하나님을 보여준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즉 유니테리안이나 유대교의 유일신론은 하나님의 역사를 한 측면에서 보여주지만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역사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는 보다 역동적인 교리라는 말이다. 적어도 삼위일체에서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측면에서 역사하신다는 말이다. 매우 적절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개략적인 설명으로는 삼위일체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다. 위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역동성, 즉 세 가지 차원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너무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이 세 가지 양태(mode)로 나타나셨다는 이른바 양태론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목회자들이 설교 시간에 가장 많이 삼위일체의 예로 들곤 하는 ‘아버지, 남편, 아들’, 또는 ‘기체, 액체, 고체’의 세 가지 형태라는 비유는 ‘양태론’의 오류를 그대로 드러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나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초월해 계신 절대자요, 초월자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 또한 하나님이 성부시대와 성자시대에 역사하셨고 지금은 성령시대이므로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주장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이 마치 3분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삼신론(three Gods)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지 세 분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양태론과 삼신론은 목회자들이 가장 쉽게 빠지게 되는 삼위일체의 오해 또는 왜곡이다.
▶삼위일체의 예로 들곤 하는 ‘아버지, 남편, 아들’, 또는 ‘기체, 액체, 고체’는 ‘양태론’의 오류다
또 다른 오류를 지적하자면, 삼위일체 신앙이 정확히 성서에 근거해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구절부터 성령의 역사라고 해석하곤 한다. 또한 복음서와 서신서의 많은 구절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고(381) 신양성서 정경이 완성된 때(397)를 고려해보면 맞지 않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서에는 ‘하나님에 관한 삼중적인 형식’이 이곳 저곳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라고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성서에는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후 성령의 체험으로 형성된 초대 교회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삼중적인 형식이 예배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헬라 철학을 공부한 바울이 헬레니즘 세계 문명권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기독교는 헬라철학의 도움을 받아 복잡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구약성서 시대나 역사적 예수 시대와는 매우 다른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기독교가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로마의 종교로 인정된 후에 바로 콘스탄틴 황제는 325년에 니케야공의회를 열어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을 명령했다. 이때까지 곳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던 삼위일체의 교리가 이제 보편교회가 인정하고 사용할 수 있는 교리로 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는 신학자들이나 초대 교부들이 함께 모여 충분한 토론을 걸쳐 형성된 교리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의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삼위일체가 아타나시우스파 한쪽의 입장을 토대로 기본 교리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케야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의 토대가 형성되었을 뿐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론에 관한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우여곡절을 통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쳐 그리스도론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후에도 두 번에 걸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 683)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한 문제들이 논의되었고, 정통으로 간주한 삼위일체 논리에 벗어난 이론들을 정죄했다. 또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나 신약성서가 정경으로 확립된 카르타고 공의회(397)를 생각해 보면 거의 400여 년간 기독교는 지금과 같은 삼위일체 교리도 없었고, 정경으로 간주된 성서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물론 그래도 그 시대 기독교인들은 훌륭한 신앙을 대대로 전할 수 있었고 마침내 로마의 종교로까지 자신들의 종교를 승격시키기까지 했다. 교리를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사뭇 궁금하다.
▶성서에서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라고 언급한 구절은 어디인가?
어쨌든 삼위일체는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독교 전통이 되었다. 삼위일체가 바울의 헬라화된 기독교의 부산물이라는 비판을 듣는다 하더라도, 삼위일체는 기독교 예배 안에 뿌리 내린 확고한 기독교 전통인 것이다. 이제 문제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는가 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미사 때 자주 쓰는 “이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라는 말로 삼위일체를 얼버무려버릴 수만은 없다. 물론 삼위일체가 신앙의 신비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까지 다 포기해 버리고 설명 내지는 이해하려는 시도까지도 무시해 버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필자는 현대 삼위일체의 해석 중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제시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 또는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이 매우 타당하며 의미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보프나 몰트만은 초대교회에서 사용되었던 헬라어 ‘단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페리코레시스란 ‘상호순환’, ‘상호침투’, ‘상호내재’ 등으로 번역된다. 보프나 몰트만은 페리코레시스를 사용하여 한 위격에 두 위격들이 상호침투되어 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 용어가 언제부터 삼위일체에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다른 위격 안에 포함되고 내주하며 존재하는 어떤 상황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이 경우 페리코레시시는 상호순환의 뜻을 지닌다. 이 뜻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면,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 안에 존재하고, 다른 두 위격들을 둘러싸며, 다른 두 위격들과 똑 같은 영역을 차지하고 다른 두 위격들을 채운다는 의미이다. 둘째, 페리코레시스는 활동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과 더불어, 동시에 다른 위격들 속으로 상호침투하거나 상호 얽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페리코레시스는 하나님의 세 위격들에 독특하게 적용되며, 세 위격의 살아 있고 영원한 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한다. 즉 하나님의 위격은 셋이지만 서로 동등한 상호 침투 내지 상호교류를 통해 하나라는 전체성을 늘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1+1=3이 아니라 1+1+1=1이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페리코레시스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적용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17:21). 인간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말인데,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아들의 인격 안에 공존하며 일치된다. 두 본성이 인격 안에서 너무도 깊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한 본성의 속성들은 다른 본성의 속성들과 상호 교환된다. 두 본성은 용해되거나 혼돈됨 없이 서로에게 상호 침투한다는 것이다. 즉 신성은 인성을 입고 신성과 인성 각각은 동일한 하나님의 본체의 전체성을 가짐으로써 진정한 페리코레시스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속성의 교류라고 부른다. 둘 같지만 속성의 교류를 통해 하나라는 전체성을 견지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인격, 관계성, 신성, 발현 등으로 설명하는데, 이런 방식은 페리코레시스 모델에서 모두 설명가능하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세 위격의 연합과 상호침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삼위의 일치는 상호침투와 연합의 일치인 것이다. 상호침투와 연합을 통한 한분 하나님이 되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론’ 또는 ‘공동체적 삼위일체론’
페리코레시스 모델은 삼위일체의 중요한 의미를 드러낸다. 즉 삼위일체는 피조세계를 포함해서 세 위격의 존재를 넘어 열려진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서로 동등한 위격들의 상호침투와 교류를 통한 일치는 그를 믿는 인간과 피조세계 역시 동등한 관계에 기초한 공동체 내지 사회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먼저,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이룬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그런 모습을 띤 진정한 공동체, 어떤 위계질서나 차별이 없는 동등한 구조의 공동체를 구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 더 나아가, 인간 사회 전체가 삼위일체로부터 영감을 받아 친교, 기회의 균등, 개인과 단체가 동등하게 중요시되는 사회를 형성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 역으로 말한다면, 모든 면에서 이루어지는 참여와 연합에 기초해 사회구조가 이루어진 자매와 형제의 사회만이 삼위일체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런 사회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지배와 억압이 없이 전체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기독교 공동체, 계급 지배와 독재의 억압이 없이 전체적으로 통일된 하나를 이루는 인간공동체만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사회는 인간의 권력이나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특징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야말로 교회와 사회를 위한 영감의 원천이다. 삼위일체야말로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해야하며, 또한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제시해 주는 지침이다. 삼위일체야말로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영성의 근거이다.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자들이라면 세 위격이 동등하게 서로 교류하며 침투함으로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그런 신앙을 생활 속에서 구현해내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성적 의미이다.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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