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선우 목사님은 거룩한빛광성교회에서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액츠청년뉴스
얼마 전 한 청년을 심방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린 자연스럽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었기 때문이다. 그 일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참 마음이 아팠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일어났고, 그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던 중 청년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목사님. 저는 요즘 평화의 왕 예수님을 기다려요. 지금 일어나는 이 전쟁, 그리고 전쟁같은 우리의 삶 가운데 평화의 주님이 빨리 오셔서 우리를 평화로 인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누구나 평화를 원할 것이다. 그 누구도 분쟁 속에서 살고 싶지 않을 것이고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쉽지 않다.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바라보면 평화롭지는 않다. 큰 전쟁 뿐이겠는가? 내 삶이 일어나는 여러 일들로 부터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회를 보면 잘못된 경쟁의식, 서로를 향한 오해, 미움, 시기, 질투, 참 많은 분쟁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세상 뿐만이 아닌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시는 그 때. 그 때도 세상은 분쟁 속에, 전쟁 속에 살아갔었다. 이스라엘 사회는 혼란스럽고 어지럽고 불안했다. 끊임없는 힘의 싸움이 있었다. 헤롯왕의 통치 시절 그는 강한 힘을 갖고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그의 말이라면 그게 옳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광야고, 생계는 농업이나 목축업 등이었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많았다. 그런 상황 가운데 로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금까지 걷어갔다. 종교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다. 지속적인 우상 숭배가 만연했으며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도 서로의 생각이 달라 자신만의 믿음을 지키며 서로 정죄하는 일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빨리 메시아가 오시길 바라였다. 그 이유는 ‘왕의 오심’ 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왕’ 이란 큰 힘을 갖고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메시아가 이 땅 가운데 오신다면 이 모든 것은 해결될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더 큰 힘을 발휘하여 자신들을 살려줄거라 생각했고, 더 큰 능력으로 모든 것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만들어줄거라 생각했다. 헤롯도 메시아가 오심을 두려워했다. 만약 두렵지 않았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텐데, 메시아의 소식을 듣고 찾아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 혼란의 시기. 미움과 질투가 있는 시기.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 바로 그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가운데 오셨다. 그런 그는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왔을까?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1)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세상을 통치한다는 뜻이다.
2)기묘자, 모사라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우신 분이라는 뜻이다.
3)그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4)그런데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평강의 왕’ 이라 한다는 것이다.
7절을 이어서 읽어보면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7-
무슨 말일까? 우리에게 메시아, 이스라엘의 왕, 세상의 왕이 올텐데 그 분은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고 기묘자이자 모사이시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신데 그 분은 ‘평강의 왕’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나라는 점점 더 굳게 세워지는데 그것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함으로 이루어진다고 이야기를 한다. 조금은 이상하다. 평화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 분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힘’ 이다. ‘권력’ 이고 ‘능력’ 이다. 그것으로 평화를 이루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메시아의 역할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겪는 고통에 벗어나게 해주는 더 큰 힘을 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어지러운 내 삶 가운데 분쟁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화의 빛으로 오셨다는 예수그리스도는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가셨을까? 세상의 힘 보다 더 큰 힘으로 장악하셔서 평화를 이루어가셨을까? 세상의 왕들 처럼 무력으로 무엇인가 끌어내어 평화를 만들어갔을까?
아니다. 힘도 아니었고, 권력도 아니었다. 바로 ‘사랑’ 이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의 ‘섬김’ 이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평화를 가지고 오는 방법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고 그의 왕권이 점점 더 커지며 나라를 굳건히 세우는 방법은 가장 낮은 곳으로 가서 아무도 찾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이며, 아무도 마주하기 싫은 병자들을 찾아가 만지셔 치유하신 것이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그리스도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남 나라의 평화는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질투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 시기가 없는 곳이다. 미움이 없는 곳이고, 슬픔이 없는 곳이다. 눈물이 없는 곳이고, 아픔이 없는 곳이다. 사랑만이 남아있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곳이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평화의 하나님 나라이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선택한 평화의 방법이다.
평화가 무너지는 이유는 ‘사람의 욕망과 욕심’ 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란 존재를 찾아가셔서 사랑하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엔 평화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물론 우리가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일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 가운데 내 삶 가운데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내 삶 가운데 평화가 필요한 곳은 어디일까. 관계, 경쟁, 사회, 차별, 시기, 질투, 분쟁이 생겨나는 곳 가운데 우리는 서로를 사랑함으로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어야한다. 차별이 없고, 분쟁이 없고, 시기와 질투가 없고 슬픔과 고통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는 노력이 있어야한다.
분쟁 속의 평화의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자. 그리고 내 삶의 평화를 그 분과 함께 만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