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이후의 신학과 영성을 생각하며
이정순 교수(목원대 신학과)
올해도 어김없이 세월호 참사 추모일이 다가왔다. 5년전 4월 16일 갑작스런 참사로 무고한 학생과 시민 304명이 죽고 실종되고 말았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한 후에도 충분히 구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정부 당국과 해경은 힘을 다해 구조하지 않음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엄청난 참사였다. 특히 희생자들 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마음은 참담하다 못해 찢어진다.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으면서 이제는 가슴에 묻고 더 이상 거론치 말자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지난 5년간 세월호 사건을 무슨 큰 상이라도 된 듯이 지긋지긋하게 우려먹었으니 여기서 끝내야 한다는 말도 한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를 단순 선박사고로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참으로 세월호 참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같은 동료 인간의 현실을 외면하는 비인간적인 반응이다. 내 자식이 그런 끔찍한 참사를 겼었다면 그런 반응을 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지난 5년 동안 한국교회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무엇을 말하고 무슨 일을 했는가? 세월호 참사는 특히 한국교회 신학과 영성의 방향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는 같은가? 또 아무 일도 없었듯이 과거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갑작스럽게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모름지기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이 시대의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이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얼마나 많은 한국교회와 신앙인들이 관심을 갖고 유족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알고 그들과 함께 울었는가? 세월호 유가족들이 생업을 포기한 채 거리와 광장으로 나다니며 세월호 참사의 온전한 진상규명을 위해 온몸으로 투쟁할 때 얼마나 많은 한국교회와 신앙인들이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들과 연대했는가? 4월 16일을 전후해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며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과연 몇 교회나 있을까? 1,000만 여명의 신자를 자랑하고 세계적으로 큰 메가 처치들이 있다고 자부하는 한국교회 중 소수만이 세월호 참사에 관심을 갖고 유족들을 돌보며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 왔다. 마치 소수의 남아 있는 자들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무엇보다 회개가 필요한 때다. 이웃의 아픔에 함께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몰아부쳤던 자세를 회개해야 할 것이다. 내 자식은 죽지 않았으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저들의 아픔을 외면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국가 시스템의 잘못과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내 탓이요”, “우리 한국 교회 탓이요”를 외치면서 재를 뒤집어쓰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할 때이다. 진정한 회개야말로 새로운 삶을 향한 첫 걸음이다. 예수님도 첫 번째 외친 메시지가 회개의 메시지였지 않은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 세월호란 대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가, 회개를 위한 카이로스가, 새 시대의 신앙과 영성을 위한 카이로스가 이제 이 땅에 임한 것이다.
세상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크로노스를 넘어서는 또 다른 시간이 질적인 시간, 의미 있는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시간인 카이로스가 있다. 이제 세월호 참사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카이로스를 체험하며 우리 모두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신학과 영성을 모색할 때이다. 그만큼 세월호 참사는 하나님이 한국교회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위해 주신 역사적인 기회요 때이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있듯이 세월호 참사야말로 한국 교회를 위한 큰 전환점이다. 이 말에는 세월호 참사 이전의 한국교회의 안일하고, 개인중심적이고, 기복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신앙에 대한 반성이 전제되어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이런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세월호 참사는 그야말로 무의미하고 평범한 또 하나의 사건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양심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으로 사람 사는 사회를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세월호 참사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인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마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중심이 무너지고 있는”(W. B. Yeats) 우리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 때 그 순간 그 바다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을 때, 해경마저도 구조하기를 외면해 버린 바로 그곳에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고 우리는 절규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존재 중심이 흔들리는 사건과도 같다. 하지만 그런 절규는 절규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신앙과 영성으로의 길을 향해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한국 기독교는 무관심과 나홀로의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대신 한국 기독교는 공감과 연대의 종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는 종교, 아파하는 자와 아파하는 종교, 탄식하는 자와 함께 탄식하는 종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에 오셨을 때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눅 19:41). 또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가족들이 슬피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비통해지셔서 눈물을 흘리셨다(요11:33-35). 그야말로 예수님은 인간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 중 하나도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 롬12:15) 였다. 기독교는 아픈 사람과 함께 우는 종교다. 그들과 함께 울며 그들의 아픔을 느끼는 종교다. 현대 용어로 말하자면 기독교는 ‘공감’(sympathy)의 종교인 것이다. 공감이란 함께 감정을 느낀다는 뜻이다. 공감이란 타인과 같은 감정의 상태가 되어 그들의 눈과 귀로 세상을 보고 듣는 것을 뜻한다. 철저히 나 자신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고통받고, 슬퍼하고 탄식하는 자들의 입장이 되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는 공감과 연대의 종교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길을 먼저 실천하셨다.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인 성육신의 교리, 즉 절대자요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유한한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셨다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선언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제 하나님은 저 하늘에서 이 땅을 이끌어가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 한 가운데서 인간과 함께 아파하며 역사하고 개입하시는 분이시다. 빌립보서 2:6-8에 기록된 ‘자기 비움의 그리스도론’은 이 진리를 더 구체적으로 선포한다. “하나님과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웠다는 헬라어 단어 ‘케노시스’는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채우려고만 하지 않았는가? 나 자신만의 신앙에만 몰입하지 않았는가? 이웃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나 하나만, 우리 교회만, 한국 교회만 성장 발전하면 된다는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않았는가? 특히 한국 교회는 축복과 성장의 논리로 계속 채우는 데만 힘쓰지 않았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진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이제 우리 자시늘 비워야 할 때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셔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그를 믿는 우리들 역시 자신을 돌아보며 비워야할 부분을 비울 때 우리 주위의 슬피 우는 이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사는 세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진정으로 그들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그들과 함께 공감하며 그들의 편에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영성은 무엇보다 슬퍼하는 이웃과 함께 슬퍼하고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며,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유가족들의 한 맺힌 절규가 철저한 진상규명과 정당한 심판으로 해결되고,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되어 유가족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이들과 함께 적극 연대하고 노력하는 실천의 신학과 영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런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구조의 변혁을 위해 사회문제를 예언자적으로 비판하고 해결을 위해 적극 개입하는 신학과 영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4월은 아픔의 계절이다. 416 세월호 참사와 419 혁명이 일어난 달이다. 또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4월은 결국 부활로 이어진다. 5월의 푸르른 희망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들 삶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시작된 미래에 대한 희망, 즉 현재로 뚫고 들어오는 새로운 미래의 현존이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먼저 가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갈릴리(막16:7), 그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가 그분이 시작하신 그 일을 힘차게 감당하라는 카이로스의 부름인 것이다. 또한 진정한 마음으로 애통해 하는 이 땅 모든 이들의 가슴 가슴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가득 차게 하라는 카이로스의 부름인 것이다. 이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 .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새로운 발걸음이라는 것을 . . .
서러워 말아요 꽃잎이 지는 것을
그 향기 하늘 아래 끝없이 흐를 텐데
그 향기 하늘 아래 끝없이 흐를텐데
아쉬워 말아요 지나간 바람을
밀려오는 저 바람은 모두가 하나인데
밀려오는 저 바람은 모두가 하나인데
부르지 말아요 마지막 노래를
마지막 그 순간은 또다시 시작인데
마지막 그 순간은 또 다시 시작인데
– 조동진의 ‘다시 부르는 노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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